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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스토리와 태도 / 인문학과 종교

memo79257 2026. 4. 4. 18:27

 

 톨스토이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다. 또한, 누구나 질문을 가지게 된다. 왜? 사는가? 

 우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라고 생각들을 한다.

 우린 생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우린 추억을 기록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삶이란 무엇이고, 또,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그것은 결국, 스토리와 그것으로 인해 나오는 태도(깨닮음)으로 이어진다.

 삶이란 것은 결국 스토리이고, 그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태도를 결정짓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핵심이다.

 또, 삶의 정수이다. 

 

 좀머씨 이야기 - 튀스킨트 

    이 이야기의 공포물 버전이 또한, 남극일기가 아닐까 한다.

삶의 의미를 찾기위해 끝없이 헤메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때, 그 삶들은 허무하게 끝남을 이야기 한다. 원래 삶은 의미가 없지만(헛되다), 주변인들과의 관계나, 여러 이벤트들을 통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우린 거기서 마음과 정신의 풍요와 안정을 찾는다. 물론, 욕구의 해소도 찾는다. 경제적이든 정신으로든 마음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육체적인 것은 육감에 관계된 것을 말한다. 먹는것 입는것 싸는 것(여러 의미로) 

 

그 의미가 어떻게 부여됨에 따라 삶은 공포도 환희도 된다.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흐르던간에, 말이다. 

그것은 개인들의 성향과 태도로 삶을 견디어나가게 된다.

 

 MBTI에 대해서, 처음 언급한 문학서가 아닌가 한다. 하나의 성향은 지(INTJ)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사랑 (ESFP) 인 두 성향이 격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똑같은 사회적 환경과 사건에 대해서, 두 성향은 서로 다르게 반응하고, 다르게 해결하며, 다른 결과물을 가져가게 된다. 누구에게는 축복이고, 누구에게는 저주인 재능이, 환경과 사건에 따라, 계속 축복이되거나 저주가 된다. 

결국, 자연은 똑같은데,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는 "태도"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모든 현명한 사람은 바로, 태도를 말하고 있는것이고, 

 모든 현명한 종교는 바로 그 태도를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것이고, 불교는 내가 삶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핵심은 스토리와 태도이며, 그것으로 사람은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진리를 찾아가는 끝없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이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서구권에서는 인문학이 중요하고, 또, 인문학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서 바라봐야 하는 것은 오히려 태도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남에게 바뀌라고 말하는게 아니다. 남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성서와도 일치한다. 

 왕이자 지도자가 된 사람이 처음 한 말이다. 남에게 믿으라 말라 말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하겠다라고 말한다. 선택은 알아서들 하라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태도가 스스로 바뀌기를 바란다. 물론, 나중에 모두 깨닫게 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 태도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길로 통하게 된다. 그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이다. 다른길은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를 떠나서 다른 길이 존재한 적이 없다. 

그것은 여러말로 표현되었는데, "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 "악은 반드시 망한다" 이런 말들이다. 또,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라고도 했다. 

 

 올바른 길만이 올바른 길로 좋은 길로 인도한다. 

 

 더 막말로,

 부자가 되는 다른 길이 있는가? 부자가 되는 길도 유일하다. 올바르게 벌어, 올바르게 투자하라고 모든 지혜로운 성공자들이 말한다. 다른 길이 없다. 그러므로, 가난은 자기 책임인 것이다. 오래가는 부자는 지혜롭고, 모든 사실들을 많이 깨달아, 현실을 직시한 사람들이다. 여러분들은 노력하면 반드시 작은 부자가 될수 있다. 

 

明心寶鑑(명심보감) 11.省心篇 上(성심편 상)] 48.작은 부자는 근면함에 달려 있다

 

 누구나 근면하고 아끼고 절약하면 작은 부자가 될 수 있다. 

4년 만에 1억 모으고 방송 출연20대 女 '놀라운 근황' [인터뷰+] -한경

근데 하기 싫자나. 저 4년은 결코 쉬운 4년이 아니다. 아끼고 절약하며, 지루함을 이겨낸 결과이다.

그렇다고 해도, 엄청나게 고통을 겪는 과정은 아니다. 참고 인내하는 지루한 삶을 반복하는 과정일 뿐이다. 

 레버리지 안하고, 곱버스 이 지랄 안하고, 자기가 모은 돈으로, 성실하고 열심히 돈벌며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돈을 투자하고 기다리는 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즉, 확실히 성공할 것 같은 곳이 저렴할 때(아직 성공못했을때), 투자하라는 것이다. 그는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성공에 올라탈 뿐인 것이다. 물론, 중간에 무슨일이 벌여져서(외부사건), 그가 힘들수 있거나, 망할수도 있지만. 공포에 팔지마라. 공포는 결국 지나가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열심히하고 머리좋으며 근면성실하고 정직하면 그는 성공할 것이고, 나는 그 성공에 올라탄다는 것.

 

 즉, 올바름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이다. 

 

 주식은 항상 오르고 내리지만, 돈버는 사람은 몇 안되고, 그 돈을 버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태도"라는 것이다.

 항상 시장상황이 바뀌지만, 누구에게는 기회이고, 누구에게는 위기이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태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삶 뿐만이 아니다. 전쟁에서도 그러했다. 잘싸우고, 힘이 쎄면 이길거 같은가? 

 

전란의 시대에 의로운 장수라 불렸던 에치고의 군신, 우에스기 켄신.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 통칭 에치고의 . 센고쿠 시대 전국 3영걸이라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로 많은 인기를 누리는 무장이다. 카이의 호랑이가 별명이었던 다케다 신겐[2] 에치고의 용이라는 겐신은 용호상박이란 고사성어에 걸맞은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며 스스로 비사문천(毘沙門天)의 화신이라 믿었으며 정의감이 투철한 의리남이었다. 실제로 아버지부터 동맹 이마가와까지 뒤통수를 자주 쳤던 다케다 신겐에 비하면 우에스기는 대체로 정의라는 명분을 크게 저버리진 않았다. 그러나 정의의 편이라는 단순한 수식어는 과장이 들어간 평으로, 평소 행적은 그야말로 본심을 알 수 없는 행동들로 점철되었다는 평도 존재한다. 명분을 중시하고, 구() 시대 질서에 대한 신봉자로서 난세라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결정을 자주 내렸으며 이타적이었던 탓에 정의의 화신으로 미화된다. - 위키

 

우에스기 겐신의 '소금(적에게 소금을 보내다, 敵に塩を送る)' 일화는 숙적 다케다 신겐이 적들의 무역 봉쇄로 소금이 부족해지자, 겐신이 의리를 지키며 소금을 보냈다는 고사성어입니다. 이는 치열한 전쟁 중에도 정당한 경쟁과 호의를 중시한 겐신의 '의(義)'를 상징하며, 오늘날 적의 위기를 이용하지 않는 대범함을 뜻합니다

 

즉, 그는 정의만을 따랐다. 적장이라도 정의에 맞다면 도왔다. 

그래서, 그는 최강이었고, 그는 전승(한번도 진적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또한 종교로도 이어진다.

 경전이 무슨 말인지 안 보인다면, 그것은 욕심과 이해관계를 따르는 혼탁한 마음때문인 것이다. 

 

 성경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같은 이치이다. 올바름을 찾아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결국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길임을 말하고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을 찾게 되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을 잘못보게 된다면,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받는 것과 신비로운 무언가와 기적과 예언 만을 찾게 된다. 현대적으로 본다면, 대표적으로 바이블코드가있다. 성경의 글자를 조합하면 예언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종교성이 있다. 즉, 기적이나 환상같은 미스터리 요소가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의 핵심은 기적이나 환상같은게 아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세상의 신들은 무언가 잘되게 하고, 복을 받고, 내가 잘되고, 내 적이 안되고, 하는 것을 빌러간다. 그 세상의 신들이 바알이라 불리던, 아세라라 불리던, 몰렉이라 불리던, 다곤이라 불리던, 그모스라 불리던, 아스다롯이라 불리던, 레판/키윤이라 불리던, 니스록이라 불리던, 아르테미스라 불리던 모두 한가지다. 뭐가 잘되고 뭐가 풀리며, 이런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정의시고, 공평이시며,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모든 올바름이시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올바름을 믿는 것이다. 즉, 올바르면 승리한다. 그 승리를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 라는 것이다. 인류가 살면서, 결국 악인이 징벌받고, 그 악인이 잘되는 듯 보여도, 결국 그 후손까지 보면 아니다라고 말하며, 정의가 꼭 승리한다라고 보면,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 존재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즉, 올바르게 살아야 잘사는 것을 믿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 여기에 모순이 있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안 믿게 된다. 

  돈과 하나님은 함께 섬길수 없다고 말하던가. (이게 돈이야기가 아니다.)

  올바름과 이해관계는 양립하기 힘들다.

  우물쭈물하는 유비는 결국, 부인 손상향이 떠나는 것을 막을수가 없었다. 

  하나 남은 부인으로, 젊고 미인이며, 손권의 여동생으로 매우 아꼈다. 그래서, 유비는 매우 절실했다.

  방통은 3가지 계책으로 서천을 빼앗자고 말한다.

  그것은 모두 훌륭한 계책으로 빼앗는 것은 쉽다.

  서천이 없으면 유비와 그 일행 모두는 목숨이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면, 사람들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욕을 할 것이다. 천하의 유비도 별수 없다고.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유비를 떠날 것이다. 올바름이라는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해관계와 올바름중 무엇을 선택할수 있는가? 

 

  (물론, 성경은 죽을지언정 올바름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보상으로 부활과 천국이 주어지는 것이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 모순을 처음부터 가정하고 있다. 성경속에 항상 두 부류가 나온다.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 

    둘을 항상 비교한다. 

    믿는자에 대한 묘사를 보면, 항상 하나님을 믿었다가 강조되는 것을 사람들은 그것만 본다. 그런데, 반드시 뒤에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는 의롭거 거룩하며, 선을 행하고 올바르게 살았다. 그래서, 모든일이 형통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선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잘 되더라. 라는 가정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이 망할때가 있다. 잘 안될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믿지 않는자들이 나타나서, 조롱한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왜? 악한 사람들이 잘살고, 착한 사람들이 힘든가? (악인의 형통) -(선인의 고난)

    그럼, 모든 사람이 착한가? 죄를 하나도 평생 저지르지 않는가?

    그럼 모두 악인이라면, 모두 지옥에가서 벌을 받게 되어야 하는가? (모두 죽을수 밖에 없는 운명, 모두 형벌(지옥)받을 운명)

    라는 모순과 권선징악을 믿지 않는 조롱자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이 불완전한 권선징악을 완전하게 만들 존재가 필요하다고 계속 역설하고 있다.

     - 그래서, 하나님이 권선징악을 행하신다면, 그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또 다른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서, 이 권선징악을 완성시켜 주셔야 하는게 필연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 즉, 권선징악은 진짜 있다라는게 되는 것이다. 

    

   예를들면, 이것이다.

      잘못했으면 죽어야 한다. 

      이것은 정의이다.

      그런데, 잘못한 사람을 모두 죽이면,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 

      그래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모든 악인을 사랑해고 용서해 줘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 이 악인이 잘못에 대한 반성과 행동, 그리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개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 정의의 기준으로 오차없이 잘못하면 죽인다. 그게 올바르다. 

       반: 아니다,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사랑과 용서도 올바르다.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게 올바른 것이다.

       합 : 첫개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 올바른 것은 올바른 것이다.)

             두째개명은 이웃을 사랑하라 ( 그래서,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줘라. )

 

그게 하나님의 본래 뜻이라는 것이다.

     (바리세인) 정 : 일요일에 일하면 모두 죽여라

     반 : 그러면, 전쟁이나거나 누가 위험에 빠지거나, 불이나도 일하면 안되는가.

     합 : 일요일에 쉬는게 원칙이지만, 

           사람들이 살아가게 최소한의 것은 도와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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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더 심오한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카뮈 

 

삶에는 어떠한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진리라는게 매우 어려운 것이고, 인간이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부조리라고 한다. 진리인데 모순인 것이면서, 동시에 그 모순이 진리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헤겔은 이것을 변증법으로 푼다

 

A : 밥을 먹으면 살찌니, 밥을 먹지 말아야 한다.

B : 밥을 안먹으면 배가고프니, 밥을 먹어야 한다.

A+B : 그럼 밥을 적당히 먹어야 한다. 

 

 

 

 부조리에 대해서, 

그래서, 위에 내용을 이으면, 

     사람은 살면서, 어쩔수 없이 죄를 지을수 밖에 없다. 

     그러면, 모두 죽을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누가 살아남을수 있는가?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므로, 오직 선하신분은 한분이시고, 선한것은 영원하므로, 영생하시는데, 우리는 그 영생에 들어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하게 되는 방법은 최소한 선하게 살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지만, 선하시고 죄가 없으신 분께서, 이들을 중보하시는 것이다.

 

    이게 무슨말이냐하면, 두 강도가 있는데, 하나는 사람을 한번죽였고, 하나는 열번죽였는데,

   재판장에게 말하길, 내가 사람을 한번밖에 안죽여서 내가 더 착하니. 저 놈을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저런 놈도 용서가 되니, 사람한번 죽인게 대수입니까. 나도 용서를 해주셔서 살려주십시오. 

  라고 말하면, 재판장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죄인으로는 다른 죄인의 용서를 구할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며, 예수를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는 것인데, 선하게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 즉 태도.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를 맺을수 있는 방법은. 

 예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유를 설명한다.

 성경 전체가 이 설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실존하시면 (권선징악이 실제로 일어나는 진리적 법칙이면) 

             예수님의 존재는 필연이고, 둘은 하나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 종교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책이다.

 

 

 물론, 유태인들은 그리스도가 그런 존재인 것을 부정한다. 그들은 이 부조리자체를 부정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 즉, 선민사상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선민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싹스리하여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올바름은 율법이다. 그래서, 율법이 올바르게 되어 지키는게 아니라, 올바른게 율법이라서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일요일에 쉬는 것은 올바른 것이고, 남이 죽더라도 도우면(일하면) 안되는 것이다. - 바리세인들. 

 

 그러므로, 이들의 경제와 사회는 모두 율법을 기준으로 되어있으며, 율법은 이들의 밥줄이었다. 

 모든 율법을 지키면서 들어가는 경제적 비용을 착복했고, 그것을 업으로 삼았다. (지금과 비교해보라) 

 성경에도 이 사태를 계속 우려하고 구약때부터 말하고 있다. 그러지 말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등장은 이들에게 매우 큰 도전이었다. 사회질서 자체가 붕괴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올바름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

 

 즉, 이제는 돈 VS 올바름이 아니라,

                목숨 VS 올바름으로 상향된다. 

 

올바름은 사람과 돈 모두를 버리게 만든다. 

 

 

물론, 성경에서 무조건 올바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최고의 경지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인자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최고의 경지에 가면, 최고의 보상을 주실것이라 말씀하시지만, 조금밖에 못지켰다고 해서, 지옥에 던져넣으시지 않으신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빌다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죄를 하나지었다고 죽이려 하지 않으신다. 

그대가, 일천개의 잘못이 있더라도, 50개의 잘한게 있다면,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라는 것이다. 

 즉, 그대가 아무리 죽을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선한 태도를 가진다면, 너무 구원에 합당하지 못하더라도,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베푸시려 하시는 것이다. (선행을 하나도 못하더라도, 선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면)

 (다만, 주의할 점은 선행을 아무리 하더라도, 선한 태도가 없는 것이라면, 즉, 저사람을 괴롭히려고 악행을 했는데, 선하게 되버리는 경우같은. 즉, 어떤 행위에 대해서 결과를 보지 않고, 태도를 보는 것이다. 잘하려고 했는데, 나쁜결과를 가져와도, 악행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핵심은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주여 주여하는자가 구원을 받는게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를 믿는다고 아무리 말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많이 낸다고 인정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딱 하나, 태도를 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라는게 단순히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권선징악을 행하시는 분임을 믿고, 그 믿음에 맞게 삶의 태도를 가질때, 비로서 그것을 믿음이다라고 부를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게 성서에 써있다. )

 

 

그래서, 성서는 단순하지 않고, 매우 심오하고, 이 부조리에 대해서, 끊임없이 얘기하며,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이 부조리의 해결자가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조리는 전통질서를 파괴하는가?

 이것도 최근에 많이 이슈가 되는 항목이다. 

 

 동성애는 받아주고 존중해주는 것이 사랑인가? 

 

 이것이 바로 성경을 왜곡하는 것들이다. 성경을 그것을 참소하는자라고 말한다. 사단들이 하는 것들이다.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부조리들이다.

 

 바로,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잘살게 되는 것은 공평한가? 라는 문제이다.

 즉, 에초, 권선징악이 존재하는가/.? 의 매우 교묘한 버전이다.

 공평이라는 가치는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권선징악이 공평한가?라는 것은 또 굉장히 부조리이다. 

 공평이라는 개념은 자연법칙이다. 

 즉, 물건이 지구상에서 물리법칙으로 중력에 의해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공평한 것이다. 

 그런데, 기적이라는 것은 불공평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시는 기적들은 불공평한 것이다.

 즉, 무신론이다. 

 권선징악을 올바른 것인데, 그것이 공평한 것인가?

 이것을 해결해주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긴 설명을 하려면, 성경 전체를 풀어야 해서, 이 블로그로는 답이 불가능하다. 

 

 

 

  동성애라는 것은 정말 웃기는 것이다.

  어찌보면 사랑이고, 타인에게 헤를 끼치는 것이 없어보인다. 

  그래서, 올바른 것인가?

 

  이 굉장히 악날한 논리를 깨보자.

 

  에초에, 동성끼리 사랑하는 것은 우린 우정이라고 부른다. 우정은 고결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장려를 해왔다.

  그런데, 동성애를 우정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섹스가 전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성끼리 섹스가 없이 사랑하면 우정이지만, 섹스가 성립되면 동성애가 된다. 

  즉, 동성애는 동성끼리 섹스를 하겠단 소리이다. 우정이라는 단어로 부족하니까 만들어진 단어이다. 

 

   그러면, 동성끼리 섹스를 하는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나 친구나 여러 관계가 섹스라는 관점이 끼게 된다면, 얼마나 우스쾅스럽고, 난잡하며, 사회의 신뢰관계가 깨질지 상상이 되는가?

  동물을 사랑해서, 동물과 섹스를 한들 죄가 안된다면 말이다.

  개를 키우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동성끼리 같은 공간에 있을수 있는가?

  우린 가족관계를 정립할수가 있는것인가?

  

 섹스라는 것이 끼는 순간. 굉장히 혼란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이 성적 대상이 된다. 

 결국, 그것은 위에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키게 된다. 

 나이와 연령, 성별, 사람과 짐승에 관계없이 난잡한 성적 관계. 

 성질서의 파괴. 

 그것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파괴하고, 나아가, 자연질서도 위협하게 된다. 

 절제없는 섹스는 이제 부끄럼이 아니게 된다. 

 모두가 성기를 내놓고, 벌거벋듯 다닌다고 생각해보라. 

 길거리에서 똥을 싸듯 섹스를 한다고 생각해보고,

 짐승들과 성교한다고 생각해보라. 

 

 그게 사랑인가?

 

 

 그것은 대량의 피해자를 양성하기 마련이다. 

 헤가 없다고?

 왜? 굳이 동성끼리, 섹스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가? 

 우정으로 안되는가?

  

 

 

 

 

 

 그러므로, 종교는 특히, 올바른 종교는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으로서, 건강한 사회는 건강한 종교를 가지고, 건강한 문화를유지하며, 그것이 질서가 되어, 풍요와 안정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 제일 기본 핵심에는 올바른 태도가 있는 것이고, 그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무너지면, 사회문화와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전통의 파괴라고 부른다. 

 물론, 기득권이 형성되어 약자를 압제하는 전통은 파괴되어야 한다. 올바른 종교를 가졌다면, 당연히 파괴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성서는 올바른 사회질서와 전통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비록 지루하고, 고리타분하며, 올바르게 보여서 현실에 맞지 않으며, 살아가는데 도움이 안되어 보일수 있지만, 

 그것의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쌓아올린 모든 사회적 풍요가 일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미혹과 왜곡의 시도는 끝임없이 계속 일어날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왜곡되는 순간 (호세아서) 세상은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게 예배와 헌금과 교회봉사라고 믿게되고, 목사들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기독교는 붕괴되기 시작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성서는 첫째도 둘째도, 회개하고, 올바르게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올바르게 사는 것(순종: 성경에 순종하는 것)이 제사(예배,헌금,교회봉사 들)보다 낫다.

라는 것이다.